송은 유완희 시인의 문학제 개최 손남호 2015-04-06 07:42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사)한국문인협회 용인지부(지부장 류재덕)에서는 용인시와 문화제단의 후원을 받아 오는 18일 오후2시에 용인레스피아 이벤트홀에서 일제 강점기 때 붓으로 드높이 항거했고, 언론인으로 또한 지역의 교육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신 용인 송문리 출신의 유완희 시인을 추모하고, 그의 문학을 기리는 송은문학제를 개최한다. 1부행사에서는 용인출신 송은 유완희시인에 대한 학술심포지움을 전 용인시 문인협회 함동수 지부장의 사회로 경희대 강정구 교수 건국대 김선주 교수 호서대 김종태 교수가 발제자로 주제발표를 하며 2부행사에서는 기념시과 축하공연 및 시낭송의 행사를 주관한다. 용인 출신 송은 유완희 시인에 대한 소개 유완희시인의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류(柳), 이름은 완희(完熙), 자는 공벽(公壁)이며, 호는 적구(赤駒)ㆍ송은(松隱)ㆍ유주(柳州)라 썼으며, 1901년 11월25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송문리 429번지 1호에서 출생하였다 . 유완희柳完熙 시인은 1915년 3월 양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관립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졸업하였으며, 1923년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대 법대) 본과 3년을 졸업했다. 1923년 4월〈경성일보〉 편집부 겸 학예부기자로 활동했고, 이후 1924년 11월에서 1925.6.1까지〈동아일보〉편집, 사회, 학예부에 근무했으며, 1925년 6월 〈시대일보〉, 〈중외일보〉에 근무했다. 또한 그는 직필로 일제에 저항하는 글을 게재했다가 명예훼손혐의로 1926.11.6.에서 그다음해인 1927.2.5.일까지 형무소에 수감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1927년 8월부터 1934.3.30까지 〈조선일보〉등의 편집부장등 기자생활을 했다. 1928년 이후 경성여자미술학원과 조선문학원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1934년 〈조선중앙일보〉 편집부에서 일했으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과 관련하여 1937년 11월 폐간됨에 따라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1938년 1월 평안북도 강계로 가서 출판사인 기문사 총지배인으로도 일했다. 1946~ 1947. 11월 용인여자중학교를 설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유관희교장을 추천하였으며, 이후 용인중학교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1948년 교통부에서 상임 촉탁 일을 보다가 1949년 6월 고향인 용인으로 돌아가 용인고교 병설인가, 용인중학교 교감, 송전중학교 교장으로 일했으며, 1955년 12월 14일 송전중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이 되었다. 1956년 8월20일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직을 사임하고, 세계일보사 논설위원이 되면서 유주(柳州)로 필명으로 각 월간지 및 문예지에 야화(野話)을 수차례 발표하였다 1960년 신병으로 세계일보사 논설위원직을 사임한다 그 후, 향리에서 지병을 요양하던 중, 1964년 2월17일 용인 자택에서 별세하여 송문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근대사 중 일제의 강점기시대에 시와 산문등, 글로서 항일에 앞장섰던 유일한 용인지역 출신의 시인이었다. 유완희시인의 문학작품 경향 유완희시인은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하여 1931년 카프 1차 검거 및 1934년 2차 검거 무렵까지 주로, 《개벽》,《조선지광》 및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적구(赤駒)라는 필명으로 시와 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1925년에 평(平)기자 중심인 민주언론단체의 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으로 동아일보에서 퇴사(退社)하였으나, 1925년 11월 2일 시대일보에 신경향파 문학의 정당성을 논한 비평「객관주의예술」과 「주관주의예술」을 발표하면서 문예활동을 시작하였다. 1926년 4월에는 개벽(開闢)에 적구(赤駒)란 필명(畢命)으로 여직공(女職工),희생자(犧牲者), 찰나(刹那), 향락시장(享樂市場)을 발표하였으며, 11월엔 필화사건으로〈중외일보〉의‘거미줄란’에 집필한 기사가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3개월간의 옥고(獄苦)를 치렀다. 그 후 프로시 “나의 요구”, “나의 행진곡”,“가두의 선언”,“민중의 행렬”등을 발표하여 항일(抗日)에 앞장섰으며, 카프가 결성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카프의 준기관지 성격을 띤 문예운동 2호(1926.5)에 「신흥문예의 예술적 가치」라는 평론을 실어 카프노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1920년대 중반이후 30년대 후반까지 《개벽》 , 《조선지광》 , 《조광 》, 《삼천리》 , 《시대일보》 , 《조선일보》 등에 시, 소설, 평론, 수필을 발표했고 세계의 프로시를 번역해서 싣기도 했다. 손남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 지역상점과 장애인의 연계고리 15.04.06 다음글 정찬민 시장·박만섭 시의원, 주민 감사패 받아 1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