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공파 회장 두천 손광섭의 삶은 무엇인가?
선비정신으로 뭉친 건설업의 장인고 밀양손씨ㅠ뿌리를 찾는 사람이다
장인자 2025-12-1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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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 손광섭 부회장을 만나 그의 삶을 조명하고 중앙종친회 발전에 대한 자문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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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와 선조들의 시향도 모시면서 중시조 광리군, 손순 시조의 향제도 밀양과 경주까지 찾아가는 열정으로 빠짐없이 참석하는 종무일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큰 나무밑에는 작은 나무가 살수 없지만 사람은 큰사람 밑에 사람이 살수 있다는 격언을 떠올리면서 두천 손광섭 부회장의 삶을 찾아보았다.

 

그의 빛나는 선비정신으로 축약할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했던 정신이 선비정신이다. -프런티어정신은 미국, 사무라이정신은 일본을 대표하는 정신이라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신은 선비정신이다, 우리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부회장으로 봉사를 하고 있는 손광섭이 바로 선비라고 생각을 한다.

 

광진건설의 대표이고 선비가 갖추어야할 덕목인 도덕적이고 정의적이며 지조가 있는 사람이다. 종사국장과 함께 만난지 4시간이 지나자, 사생활은 신사답게 깨끗하고 자신의 이익을 버리면서 건축일을 하면서도 장인정신으로 일을 하고, 이익을 위해서는 날림공사를 할수도 있지만 손해가 되어도 원칙을 고수한 건축업자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면서도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익숙하고 다양한 취미생활을 통하여 여행이 일반화 되어 가보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여행광이기도 하다, 국내여행을 하면서 천년동안 지역을 지키고 지역민들의 다리가 되어준 돌다리의 전문성은 교량 전문가를 빰치는 놀라운 식견을 갖고 있었다.

 

떨어져 있는 부분을 연결하는 것이 다리이다. 그는 교량을 건설하면서도 서로간의 소통을 하는 것이 교량을 건설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천년을 그 자리에서 지켜낼 튼튼한 다리와 에피소드가 있는 교량 건설을 해왔던 것이다, 특히나 천년을 지켜온 돌다리와 자신이 건설한 교량의 가치를 문학적으로 풀어가는 두천 손광섭이다.

 

두천 손광섭을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와 인간의 만남으로부터 우정과 사랑, 역사가 이루어지고 인생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이생에서의 만남을 전생에 인연이 있어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선친의 건설업인 유업을 이어받아 건설업을 하면서도 각자의 애환을 헤쳐가면서 정직으로 성공신화를 만들었다.

 

부친으로 물러받은 건서업이지만 부도직전의 회사이지만 부채를 갚아가면서 비가오나 눈이오나 버려져 있는 건설장비를 수집하거나 구입하여 건설역사를 스스로 작성하여 건설박물관을 사비로 만들어 후배들에게 알려주는 장인정신을 발휘하기도 하여 지역부민들의 칭찬과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한 건설업의 장인이기도 하다,‘’

 

가정에서도 손자 종욱이에 대한 남다른 사랑으로 서울대에 합격시키는 교육열도 주변의 칭송을 받기 부족한이 없다는 것을 알수있었다는 점이다. 건설장비만을 수집하고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품이나 유명작가들의 문화재급 작품을 수집하여 전시회를 하고 미술 박물관도 만들어 지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로 뛴 40년의 역사를 박물관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두천 손광섭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곧은 나무는 배어가고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굽은 나무가 아닌 곧은 나무로 성장하면서 청주시를 지키면서 밀양손씨 문중의 빛낸 인물로 중앙종친회 부회장으로 밀양손씨 문중을 발전시키는데 공헌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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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이 말하는 선조들의 삶의 길을 찾아 가보았다. 역승공(驛丞公) 손화숙(孫和叔) 30세는 황강도 역승(驛丞)을 지냄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며 영조, 흥조, 몽조이다. 장자인 영조 후손들이 대전과 청주 등지에 살고 있다. 공의 증조부 진공(晋公)은 민부의랑이요 조부 홍량(弘亮)은 밀성부원군이요 아버지 응룡(應龍)은 밀직사(密直事).

 

공은 辛亥年에 태어나니 인품이 뛰어나고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다. 丁丑年에 밀양으로부터 공주 유성으로 처음 이사를 하니 이때 공의 연세가 27세였다.전서공이 고려에 출사하여 두 차례 호서백(湖西伯)을 역임하면서 유성의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황해도 토산(兎山)으로부터 가솔을 거느리고 와서 도마동에 자리를 잡아 살았다

 

31세 영조는 자는 여창으로 1385년도 선략장군. 호불위호군을 역임하였으며 32세 맹수는 1429년 세종때 출생하여 훈련원 습득관, 건공장군행용양위 부사과를 지냈으며, 35세 인걸은 자는 희영이고 1510년도 중종때출생 안골포만호를 지냈다. 36세 의덕은 1564년 명종때 출생하였으며.공의 성품이 소박하면서도 엄숙하고 재기가 비범하였다

 

선조때는 재주를 인정받아 계공량 행예빈시작장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37세 철은 자는 여명이고 선조때 1598년 증 통정대부 군자감정을 지냈다. 38대 효달은 인조때 통정대부부호조 참의를 지냈다. 39세 시현은 1658년 효종때 증 가선대부 부호조 참판겸 오위도도총관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조상들의 길을 더듬어가면서 슬하에 아들 2명을 두고 있으며. 큰아들은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작은 아들은 법을 전공하여 변호사를 하고 있다, 손자 종현이 있는데 남다른 사람으로 서울대에 합격하는등 머리가 우수한 집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는 점이다,

 

 

중앙종친회 회장으로써 배울점이 너무나 많은 선배이기에 존경한다는 인사를 하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다음에 가르침을 더받겠다고 인사를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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