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중앙종친회 회장 손남호, 지방종친회 순회방문시작
건설의 역군! 역승공파 직장공 후손 손광섭 회장을 만나다.
용인인터넷신문 2025-12-1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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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天(두천) 손광섭은 1943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출생하였으며, 청주중앙초. 청주중,고를 거쳐 청주대학교를 중퇴하고 20년후 충남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6년 처음으로 합자회사 공영토건사에 입사를 하고 2002년 광진건설산업 대표이사로 취임을 하면서 본격적인 건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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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은 청주 건설박물관 관장과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복지재단 충북지부 후원회장을 맡아 봉사를 하였고, 청소년 폭력예방재단 충북지회장을 맡아 청소년 선도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나 향토사에 관심을 갖고 청주문화원 이사를 시작으로 밀양손씨 전국부회장을 맡으면서 문중의 역사도 기록하였다.

 

두천 손광섭은 노인의 마음이 청년같이 젊음에 이른다는 구십춘광(九十春光)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건설업 50년의 역사에 대해 내 나이에 한번쯤 꿈뀌보는 마음이거나 공감하는 사자성어처럼 80이 넘는 나이에 자연의 대장정속에서 인생을 바꾸어버린 건설업 50년을 뒤돌아보면서 인생을 논한다고 한다.

 

두천은 건설업을 하면서 백미는 다리라고 한다, 우리네 선조들은 소박하면서도 멋을 알았고 부드러웠지만 강인함이 있었다, 그런 민족정신과 지혜로운 삶이 그대로 배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지나쳐 버리거나 잊혀가는 소중한 문화유산의 한 부분인 다리! 그 다리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 발품을 팔아 일일이 찾아다니게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의 노력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면서 나의 뿌리를 생각하게 되어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부회장을 맡아 선조들의 업적이 지역사회에 미쳤던 영향력에 대해서 족보에 기록되었는지 아니면 앞으로 기록을 해야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이 먹어가면서 알게되면서 20년 가까이 종친일에 매진하기도 했다.

 

두천은 현재 밀양손씨 국자 진사공파 역승공계 후손으로 역승공계의 3개 지파중 막내인 직장공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중앙종친회 부회장직을 맡아 종친회 발전에 기여한바 크다. 가정교육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녀들이 지역의 중심 리더로 활동하고 있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꼭 나만의 생각일까? 되물어본다.

 

건설업 50년동안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높아 보물급 미술품과 가야시대의 토기, 중국과 김기창 화백의 작품과 동생 김기만 화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서예 작품을 보관하여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작품의 깊이를 설명하는데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점이고 중앙종친회장이 방문하였다 하여 작품 100여점을 관람시켰다.

점심을 함께하면서 종친회 발전에 자문을 요청하였는데, 이제는 80 넘는 사람보다는 젊음이 있는 사람이 해야한다는 신념이 명확함에 같은 공파의 후배인 손찬호 부회장을 추천하였다. 손찬호 부회장은 그동안 협찬금을 꾸준이 내주신 숨은 공로자이시다, 그런 활동을 눈여겨 보시고 부회장으로 추천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에 두천 손광섭 부회장의 입향조부터 파시조의 업적으로 뒤돌아본다

 

두천의 파시조인 국자진사공 손숙재(孫淑才) - 25를 기초로 하여 후손들이 청주와 대전에 세거지를 두고 발전하였는데 ()은 시조 문효공 순() 25세손이시며 휘() 숙재(淑才), (), 사예(士藝)이며 호는 숙재(淑齋)이시다. 고려시대에 국자진사 벼슬에 올랐다. 대전시 변동에 있는 역승공파종산에 추모단을 설단하였다.

 

공의 5대손 손화숙 역승공재실인 수정재(水晶齋)에서 매년 음력 33일에 향사를 올린다. 아들인 상서공(尙書公) 손승명(孫承明) - 26()은 휘 승명(承明)이요_자는 치명(致明)이고 호()는 은암(隱庵)또는상산(商山)이라고도 하였다. 공께서는 밤낮으로 왕을 보호하고 경호하여 홍건적을 잔멸한 뒤 환궁케 하시니 왕께서 공에게 영동정민부상서(永同正民部尙書)벼슬을 주시었다.

 

공께서는 왕에게 벼슬자리를 물리는 글을 올리어 청하시고 양주땅 풍양에 계시면서 호를 은암(隱庵)이라 하시고 명산(名山)을 두루두루 유람하시고 고 유적지를 찾아 소요자락(遡遙自樂)하시었다. 또 살으시던 곳에 산수(山水)를 찬상(讚賞)하시어 시를 쓰시니 산마루는 걸터앉은 듯 돌들은 나는듯한대 마을어귀 깊은곳에 저 객은 왜그리 바삐가나 맑은 못에 해는 지고 흰구름 솟아날 제 한줄기 신선바람 나래옷에 부는구나(山欲譐譐 石欲飛 洞天沈處 客忙歸 澄潭日落 白雲起 一路仙風_吹羽衣이더라.

 

왕께서 여러 차례 글을 보내시어 공에게 입궐을 권하시어 공께서 부득이 입조(入朝)하시니 왕께서 공에게 물으시기를 천성을 기르고 몸을 편히하는 요결(要訣)을 물으시는지라 공께서는 귀가 어둡고 말이 어둔하다고 하시며 종이와 붓을 청하시어 만족함을 알고 욕심을 적게하라는 지족과욕(知足寡慾) 네 글자를 써서 왕에게 바쳤다

 

왕께서 지족과욕(知足寡慾) 네 글자를 숙시(孰視)하시더니 왕께서 탄상(歎賞)하시고 공에게 환전리(還田里) 즉 고향으로 돌아가라 명하시고 왕께서는 친서로 상산청풍(商山淸風)이라 네 글자를 쓰시어 공에게 주시었다.

 

파시조의 증손자인 역승공(驛丞公) 손화숙(孫和叔) 30세는

공의 증조부 진공(晋公)은 민부의랑(民部議郞)이요 조부 홍량(弘亮)은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이요 아버지 응룡(應龍)은 밀직사(密直事)요 어머니는 숙부인 황씨(黃氏). 공은 辛亥年에 태어나니 인품이 뛰어나고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다. 丁丑年에 밀양으로부터 공주 유성으로 처음 이사를하니 이때 공의 연세가 27세였다.

 

공의 배위는 전서(典書) 임건(林騫)의 둘째 따님이다. 전서공이 고려에 출사하여 두 차례 호서백(湖西伯)을 역임하면서 유성의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황해도 토산(兎山)으로부터 가솔을 거느리고 와서 도마동에 자리를 잡아 살므로써 공과 큰 사위 참의 박진(朴斛)으로 각각 안팎으로 자리잡고 또 신후유택(身後幽宅)을 유점동(鍮店洞) 미전산(米田山)에 정하였다.

 

그 아들이 적자(嫡子)가 아니므로 뒷날을 걱정하여 두 사위들의 후손들을 시켜 그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하고 그 자신들의 제사를 외손들에게 맡기고 돌아가심에 그 분이 살던 집을 공에게 부탁하여 공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그 터를 지키고 자손들이 번성하고 박공의 후손들도 또한 번창하므로 사람들이 형법이 과연 영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 공이황강도역승(黃江道驛丞)을 지내는데 연세가 65세세였다.

 

오늘 종사국장 손교영, 사무국장 손영동이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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